노가다 워커의 아침 루틴
아침 6시. 어두운 정적을 깨고 세 사람의 폰이 동시에 서로 다른 알람을 울리기 시작한다. 알람 소리가 울리기가 무섭게 나는 이불을 걷어내고 벌떡 일어나 화장대 위에 충전 중인 내 폰의 알람을 끈다. 다른 두 개의 음악들이 아직 시끄럽게 울리는 걸 보니 반장들은 잠이 덜 깬 것 같다. 나는 개의치 않고 바로 숙소의 불을 켠다. 눈을 찡그리며 기지개를 켜는 반장들을 보면서 리모컨으로 TV를 켜고 채널은 KBS으로 맞춘다. 이따가 배혜지 기상 캐스터를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건을 하나 가지고 화장실로 직행해서 샤워를 시작한다. 30분 안에 세 사람이 출근 준비를 마쳐야 하기 때문에 나는 마치 로봇처럼 아침의 루틴을 수행한다. 이렇게 오늘도 노가다의 하루가 시작된다.
샤워를 마치고 숙소 바닥에 앉아 TV로 날씨를 확인한다. 오늘의 날씨를 비롯해 다음 주에 날씨가 어찌 될지 배혜지 기상캐스터의 날씨 설명에 집중한다. 여러 채널을 돌려 다양한 기상캐스터의 날씨예보를 보았지만 역시 KBS가 제일 예쁜 것 같다. 매일 같은 채널의 기상캐스터만 보니 그녀의 조그만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오늘은 무슨 옷을 입었지? 어제는 촌시런 바지였는데 오늘은 예쁜 원피스네. 굿. 아주 잘 어울려서 기분이 좋다.
칼바람의 매운맛
노가다 일꾼들은 온도에 민감하다. 오늘 온도가 어쨌다는 둥 내일은 더 내려간다는 둥 하는 화제로 이야기를 꺼내는 경우도 많다. 그만큼 현장에 있어서 기온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날 아침 날씨 예보가 알려주는 온도를 보고 방한 대책을 세워야 할지, 아니면 좀 더 옷을 가볍게 입어도 될지 계획을 세우게 된다. 전에 서산 현장에서 날씨 예보 안 보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현장에 나갔다가 너무나도 매섭고 날카로운 바닷바람에 깜짝 놀랐었고 일하는 내내 추위에 시달렸었다. 서산은 플랜트 현장이었는데 고층으로 올라갈수록 지독한 칼바람이 온몸을 샅샅이 훑고 지나갔다. 그날 서산 칼바람의 얼얼한 매운맛을 맛보고 난 뒤부터 빠짐없이 매일 아침 날씨 예보를 시청 중이다.
자, 오늘 입을 노가다 복장을 생각해 본다. 이제부터는 아침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간다고 하니까 솜옷 작업복은 나가리. 내복을 곁들인 블랙 진으로 하의를 입고 가볼까? 위에는 긴팔 티에 유니클로 플리스를 덧입고 작업용 재킷을 입으면 오늘 복장은 완성이다.
아침부터 내리는 비의 씁쓸한 맛
출근 전에 장대 비가 온다면 일하는 사람들은 기분이 씁쓸해진다. 실내 작업이 아니라면 데마찌를 맞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비 내리는 때에 야외 현장에서 일이 잘 될 리도 없고, 사고가 날 수도 있기 때문에 작업중단 지시가 내려올 확률이 높다. 내가 인력소에서도 일을 구할 때에도 그랬다. 비를 무릅쓰고 인력소를 가도 사무장이 오늘은 일감이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했다. 이는 눈도 마찬가지. 수십 미터 위에서 철골 빔 위를 걸어 다니는 철골쟁이들은 눈이 온 현장에서 일한다는 것은 스케이트 장 위에서 일을 하는 것과 똑같아진다. 그래서 대부분 데마찌가 나기 마련이다. 우리들에게 아침부터 내리는 비는 그 맛이 아주 씁쓸하다.
출근 후에 내리는 비는 아주 달달해
하지만 내가 오전 일과가 또는 오후 일과를 시작한 마당에 비가 내린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마치 씁쓸했던 에스프레소에 시럽과 우유를 넣은 바닐라 라떼처럼 비가 달달해진다. 그때는 어차피 내릴 비가 기가 막히게 내가 현장에 있을 때 내렸기 때문에 공수 인정이 들어간다.
공수(工數) : 일용직 근로자의 일당을 산출하기 위한 단위처럼 쓰인다.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하면 1공수라고 하며 1일 치 일당을 쳐준다
출근도 하지 않은 상태로 숙소에서 데마찌를 맞느니 현장에 조금이라도 있다가 데마찌를 맞아도 공수 인정을 받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출근도장은 찍었는데 집에 가면 0.3공수, 오전 일과하다가 집에 가면 0.5공수, 점심 먹고 나서 오후 일과 시작하면 데마찌라도 1공수를 다 쳐준다.(업체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다) 그래서 다음 날 비가 온다는 날씨 예보라도 볼라치면 무신론자인 토마는 항상 하늘에 기도를 한다.
"하늘이시여, 제발 내가 출근한 다음에 비를 퍼부어주세요."
언젠가 기도가 통했는지 오후 두 시 넘어서부터 어두운 구름이 끼더니 투둑투둑 비가 계속 내리기에 작업이 중단되고 숙소에 돌아간 적이 있다. 그만큼 달달했던 단비를 나는 보지 못했다.
슬그머니 봄이 찾아오나 봄
봄바람이 살랑대는 아침이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산뜻한 바람. 저기 건너편 산기슭부터 서서히 밝아오는 여명. 왠지 오늘은 기분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 업체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리 현장은 주말에는 15시까지만 일한다. 두 시간 일찍 끝나는 것으로도 사람 기분이 매우 좋아진다. TBM이 끝나고 나니까 배관반장 최반장이 모텔에서 수육 파티를 하기로 했다고 소상무도 오라고 꼬신다. 우리 업체가 모텔에 들어선 이후로 이상하리만치 다른 손님들도 함께 몰려서 모텔이 만실이 되었다고 한다. 모텔 사장은 지금 우리를 행운을 몰고 온 부적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그래서 기분도 좋은 마당에 수육도 그쪽에서 제공해서 시작한 파티라나 뭐라나. 덕분에 나도 수육 한 접시 먹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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