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들의 베테랑 박반장
아재와 할아재들이 넘쳐나는 노가다판. 거친 현장의 풍파를 온몸으로 받아내서인지 이곳은 노안을 가진 분들이 많다. 깊게 팬 주름살이나 많이 빠져 있는 치아들은 그들을 원래 나이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이게 한다. 나는 반장들의 실제 나이를 듣고 예상한 것보다 훨씬 많아서 놀란 적이 몇 번 있다. 하지만 박반장의 나이를 들을 때만큼 놀란 적이 없으리라. 다만 이때는 반대다. 많아야 60대 초반으로 보였던 박반장의 나이는 70대 초반이었던 것이다. 얼굴이 어려 보인다기보다 그의 몸 곳곳에는 정말이지 생기가 넘쳐흐른다.
철골 베테랑 박반장은 먼저 걸음걸이부터 활기차다. 발을 질질 끌거나 어슬렁 어슬렁거리지 않고 걸음이 아주 가볍고 당차다. 어깨는 펴져 있고 가슴은 당당하게 나와 있으며 눈동자는 색을 잃지 않고 초롱초롱하다. 그리고 나이를 먹었다고 동생들한테 일을 시키는 법이 없다. 컨테이너 안에 쓰레기가 차면 본인이 치우고 눈이라도 쌓이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본인이 먼저 제설작업을 시작한다. 키는 조금 작고 호리호리하지만 그의 다부진 어깨와 곧은 허리를 보면 세월의 무게는 그에게 지워지지 않은 듯하다.
그가 현장에서 일하면서 수십 년 동안 익힌 일하는 방식과 기술, 그리고 태도는 다른 반장들에게도 큰 인상을 주는 것 같다. 다른 베테랑 반장들에게도 박반장은 참 일을 잘하신다, 대단하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작업반장 이반장도 박반장의 능력을 알기에 조금 어려운 작업을 시키려고 하면 박반장은 웃음기를 띤 얼굴로 건들거리며 대답한다. "맨대가리로?" 노가다 은어로 ‘대가리’는 공수를 의미한다. 맨대가리는 1공수, 반대가리는 0.5공수와 같은 식이다. 말하자면 그렇게 힘들고 까다로운 일을 시키면서 맨대가리 일당을 줄꺼냐, 반공수라도 더 붙여줘야지! 라고 은근하게 돌려 까는 장난이다. 이반장도 그걸 알고 있기에 멋쩍어서 허허 웃고 있으면 박반장이 낄낄거리면서 결국 할 건 다해준다.
내비는 필요 없어
언젠가 금요일에 일이 끝나고 박반장의 차를 카풀해서 같이 가게 되었다. 나는 집으로 갈 수 있는 전철까지만 타면 되니까 박반장이 살고 있는 도시와 멀지 않은 전철역인 인덕원역을 목적지로 생각해 놓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호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주섬주섬 꺼내어 티맵을 키고 인덕원역을 검색한 다음에 경로와 소요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안내 시작 버튼 누르는 것만을 남겨 놓고 박반장에게 물었다. “그러면 인덕원역으로 내비 찍으면 될까요?” 그러자 박반장이 대답했다.
됐어. 나는 살면서 내비를 쓴 적이 없어.
대답을 듣고 나는 당혹스러웠다. 요즘 세상에 내비를 쓰지 않고 길을 찾아간다고? 잘 아는 시내를 가는 게 아니라 고속도로를 몇 번 바꿔 타고 국도를 거쳐서 가는 길인데 내비의 도움 없이 간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정말 안 써도 되냐고 재차 물었다. 박반장의 대답은 똑같았다. “필요 없다니깐. 그거 내비 쓰면 내가 이미 잘 아는 길인데도 딴 길로 알려줘서 오히려 헷갈리고 운전하는데 방해만 되더라고. 머릿속에 길이 다 있으니까 괜찮아.” 어쩐지 타자마자 든 생각이 차가 정말 깔끔하다는 것이었다. 대시보드에 핸드폰 거치대 등 군더더기가 아무것도 없었다. 내장되어 있는 내비는 속도위반하지 않게 경고 안내용으로만 쓴다고 했다. 나는 기분이 묘해졌다.
내비게이션 의존증
언제부턴가 나는 차를 타고 먼 길을 떠날 때면 지도를 펼쳐서 경로를 ‘생각하는 것’보다는 앱으로 목적지를 검색하고 추천 경로를 ‘따라가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게 편하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것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지만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대로 따라가는 데에는 아무런 수고가 필요 없다. 예전에 어느 여행지를 내비로 검색해서 차로 운전해서 간 적이 있다. 그런데 분명히 고속도로나 국도를 타서 가는 길이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비가 이상한 지방 도로 쪽으로 안내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투덜대면서도 내비가 안내하는 대로 꾸역꾸역 길을 따라갔고 결국엔 산을 가로지르는 1차선 도로까지 타게 되면서 이러다가 큰일 나는 거 아닌가 불안감까지 들었다. 참고로 여행지는 절대 산속의 외딴 암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러한 엉망인 안내를 선택하여 그러한 결과를 초래한 건 바로 나다. 단 한 번이라도 지도의 경로를 보면 될 텐데 그것조차 하지 않고 ‘생각하는 것’을 방기한 결과다. 요즘에는 이미 아는 길까지도 내비로 검색을 해서 경로가 서로 일치하는지 체크를 하고 출발을 하는 걸 보면 나는 내 생각마저 내비에게 ‘확인’ 받는 내비 과잉 의존이다. 반면에, 박반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가 주도적으로 길을 선택하고 나아간다.
‘나’의 생각이 결여되는 사회
길을 찾는 데만 내비게이션을 맹신하는 게 아니다. 사람들은 종종 삶을 살아가는 데에서도 내비게이션을 따라가는 것에 익숙해진 듯하다. 예컨대 삶의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자신이 ‘생각해서’ 그것을 하지 않고 편하게 내비의 경로설정에 ‘맡겨 버리는 거’다. 세상에는 편한 내비게이션들이 넘쳐난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를 물어보면 대답은 그 사람의 깊은 사유가 아니라 TV에 나온 전문가들이, 유명 블로거가 그렇게 하라고 했으니까 그랬다고 말한다. 유튜버가 이렇게 하면 된다고 했으니까. 가끔씩 그런 사람들은 경로설정뿐만이 아니라 삶의 목적지까지 내비에게 맡겨버린 게 아닌가 싶다.
잠시만 내비를 꺼 주세요
가끔씩은 인터넷에 넘쳐 돌아다니는 삶의 내비들을 잠시 꺼 놓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스스로 생각을 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거다. 항상 손에 들려서 답을 구하던 스마트폰은 주머니 속으로 넣어두고 대신 자신만의 나침반을 꺼내보자, 인생의 지도를 펼쳐보자. 내가 정말 이 길이 무슨 길인지 알고 가는 것인지 스스로 물어보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내가 어느 방위로 가는지, 앞으로 어떤 장애물들이 있는지 생각해 보자. 그래야 나중에 수많은 내비들이 이 길이 맞다고, 저 길이 맞다고 떠들어대도 나만의 중심을 가지고 뚝심 있게 길을 갈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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