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마찌 맞은 아침
오전 6시. 알람이 울리기 시작하자 나는 곧바로 알람을 꺼버리고 다시 이불에 쏙 들어와서 깨어버린 잠을 다시 청하기 시작했다. 어제 자기 전에 매일 아침마다 설정이 되어 있는 알람을 끈다는 것을 깜박했다. 왜 어서 일어나서 출근준비 하지 않고 다시 자냐고? 사실 오늘은 데마찌를 맞아서 일을 하지 않는 날이기 때문에 늦잠을 푹 잘 수 있다. 어제 저녁을 먹으면서 상무가 말하기를 내일 하루만 작업을 홀드 할 거라고 했다. 다른 현장에서 노동자 한 명이 작업 중에 사고로 죽었는데 관련해서 국토교통부가 우리 현장도 점검을 할 거라고 했고 그게 내일이라고 했다. 그런데 원청에서 괜히 국교부한테 지적사항 들어오면 골치 아파지니 아예 그날에 지적을 받을만한 작업을 하는 업체는 빼고 출근하라고 하청에게 지시한 것이다. 출근을 하지 않으면 사고 날 일도 없다...? 놀라운 발상인걸. 다시 잠을 청해볼까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
데마찌 또는 데마 : 작업 중단 또는 일거리 없음을 일컫는 노가다판 은어. 작업 시간 중에 일거리가 없어 손을 놓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일본어 手待ち[てまち, 데마찌]에서 유래했다. 데마 났다. 데마찌 맞았다ㅡ라는 식으로 사용한다.
그런데 창문으로 비치는 햇빛이 조금씩 밝아질 무렵 폰이 울리기 시작한다. 액정을 보니 소상무한테 온 전화다. 쉬는 날에는 좀 내버려 달라고! 받기 싫지만 억지로 받아본다.
“네 상무님, 전화받았습니다”
“야! 너 오늘 방 빼야 하잖아. 짐 다 옮겼어?”
이제 아침 8시인데 벌써 옮겼겠니. 덕분에 모처럼의 단잠을 깼다고. 이반장이 빠지고 혼자 모텔방을 쓴 지 며칠 되지도 않아서 지금 묵고 있는 모텔방의 한 달 계약이 끝나게 되었다. 그래서 상무가 나를 다른 모텔로 옮기라고 지시한 게 어제저녁의 일이다. 새로운 모텔방에서는 다른 아재 두 명과 함께 방을 쓰게 된다.
“아뇨. 이따 점심 먹고 천천히 옮기려고 하는데요?”
“안 돼. 10시까지는 비워줘야 해. 나 지금 차 가지고 이번에 새로 옮기는 모텔로 갈 건데 어떡할 거야? 같이 갈 거야?”
“10시요? 네... 알겠습니다. 금방 정리해서 짐 가지고 내려갈게요!”
“오래 못 기다려. 빨리 와!”
전화를 끊고 미친 듯이 짐을 가방 안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10시? 웬만한 호텔도 체크아웃은 12시인데 무슨 10시까지 짐을 비우냐. 이딴 그지 같은 모텔은 숙박은커녕 대실로도 안 나갈걸? 여친 데리고 여기 오면 헤어지자는 거지 뭐. 상무가 어디서 뜬금 10시라고 들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상무에게 반문을 하면 큰일 나기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은 삼킨다. 그래도 새로 옮기려는 모텔은 걸어서 10분은 걸리는데 무거운 짐을 옮길 수고를 덜게 되었다. 억지로 기상시간도 빨라지고. 소상무가 얄밉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그렇다. 아무튼 호다닥 짐을 챙기고 1층으로 가니까 상무가 트럭을 모텔 입구 옆에 대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서둘러 차를 타고 새로운 모텔로 출발.
차로 2분인가 걸려서 도착했다. 여기는 오래된 모텔촌이라 모텔 건너 다른 모텔이 있다. 소상무한테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짐을 챙겨서 새로운 모텔방으로 들어갔는데 룸메들은 어제저녁 집으로 갔는지 아무도 없다. 일단 오래된 모텔방인 것은 똑같은데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방에 들어가면 휑했던 저번 숙소와는 달리 여기는 테이블도 있고 의자도 있어서(!) 노트북으로 노가다 라이프를 집필하기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다. 룸 컨디션을 보니 청소도 매일 하는 것 같고 물도 생수병으로 채워주는 것 같고 수건도 넉넉히 준다. 일단 합격.
화장실에 들어갔더니 욕조가 엄청 큰 월풀 욕조다! 여기는 온천수가 나오는 모텔이라 뜨거운 물은 무한정 뿜뿜이다. 앞으로 반신욕을 자주 해야겠다. 피부가 더 좋아질 것 같다. 산골 모텔에 처박힌 숙노의 행복이란 온천욕 말고 또 무엇이 있으랴. 전에 한 번 일과가 끝나서 시내 한번 놀러 간다고 한 시간 동안 정류장에서 벌벌 떨면서 시골버스 기다려서 탄 적이 있다. 겨우 시내 도착하니까 오후 7시 반인가 그랬다. 커피 한잔하면서 시내 구경하고 돌아가려고 하니까 이미 버스가 끊겼더라. 자정 전까지도 돌아다니는 서울 버스 생각하다가 낭패를 봤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택시 타고 돌아왔다. 개고생하면서 느낀 점은 그냥 모텔에서 가만히 있는 게 최고라는 거. 데마찌의 오늘도 다를 바가 없다. 모텔방을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며 시간을 죽였다. 다음엔 또 뭐에 대해 쓰지? 노가다 라이프로 진짜 100개는 쓸 수 있을까? 안기사님 글 보면서 나도 해외 주식을 사볼까? 별생각을 다했다. 또 전화가 온다. 제기랄. 소상무다.
“야! 어디야? 밥 먹었어?”
“아뇨, 아직요. 짐 정리하고 쉬고 있는데요.”
“12시까지 모텔 앞으로 나와. 반장들이랑 같이 삼겹살 먹기로 했으니까”
“넵! 알겠습니다~ 상무님”
오예~ 그렇잖아도 배가 슬슬 허기지고 있던 참에 잘 됐다. 점심값도 굳고 고기로 배를 가득 채워야지. 예상치 못한 뜬금 데마찌는 난감하다. 계획한 것도 없는데 갑자기 자유시간이 주어진다고 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밖에 나가자니 자가용 없는 토마가 개고생할게 눈에 뻔히 보이고. 반장들이랑 실컷 맛난 거 먹고 새로운 숙소에서 푹 쉬어야겠다. 여기는 보일러를 빵빵하게 틀어주는지 방도 훈훈하다. 이따 저녁에 숙소로 복귀하는 룸메들을 만날 텐데 특이한 사람들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삼겹살 먹고 배부리되어서 모텔에서 씻고 자면 오늘 하루도 끝. 쓰고 나니 진짜 별로 한 것 없네. 그래도 이 글 하나는 남겼으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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