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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가다 라이프

[토마의 노가다 라이프 #12] 반장님, 오 나의 반장님

 

 

 

최고의 룸메, 이반장님

전에도 몇 번 글에 적었지만 노가다판의 평균연령은 꽤 높다. 우리 업체의 인력들이 대부분이 60대 중반이어서 그런지 30대 중반인 내가 느끼기에는 꼭 아버지 친구분들을 모시고 일하는 느낌이다. 특히 내 룸메인 작업반장 이반장(님)은 나이는 호적상 60대 중반이라고는 하는데 얼굴이 너무 노안이라 꼭 할아버지 모시고 사는 것 같다. 실제로 가정에서는 손자와 손녀를 둔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래도 꼰대 스타일은 전혀 아니고 오히려 나를 잘 배려해 주셔서 내가 지금까지 함께한 여러 노가다 룸메들 중에는 최고다.

 

 

 

안전관리자인 척하지만 사실 그는 작업반장이다.

 

 

 

이반장에 대해 좀 더 설명해보자면 키는 그 나이대 사람들 치고는 꽤 큰 편인 170대 중반으로 보이고 매우 말랐다. 전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큰 병을(아마 대장암이었던 것 같다.) 앓고 수술을 마친 이후 죽 50kg 초반 대라고 했다. 말랐다고 말했지만 마치 해골같이 말랐다. 그리고 걸을 때는 무슨 경공을 배운 무협지의 캐릭터마냥 엄청 빠르게 걷는다. 나도 가끔씩 뒤따라가다가 놀라곤 한다. 리드미컬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신속한 걸음걸이. 이게 정녕 60대 중반에게 나올 수 있는 움직임인가! 해골의 외모에 바가지라고 불리는 하얀색 안전모를 쓰고 흰색 마스크를 쓰고 나면 이반장은 드디어 백골로 변신하게 된다. 갑자기 그 생각이 떠오른다. 전에 현장에서 이반장이 쇠파이프를 들고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문득 디아블로의 네크로맨서가 조종하는 해골이 살아있다면 이랬을까ㅡ라는 생각을 했었다. 생각나는 대로 쓰고 나니까 이반장님께 조금 죄송하다. 사실 이반장님은 참 좋은 분이다.

 

 

 

 

 

중요한 작업에는 항상 이반장이 그 자리에 있다.

 

 

 

 

마음은 따스한 욕쟁이 이반장

이반장은 욕을 참 많이 한다. 처음 본 사람은 그와 대화하는 것이 곤욕스러울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의 욕이 노래 같다. 악의 없는 욕이 뭔지는 아주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래도 나한테는 씨팔을 조금 덜 붙여서 말하는 편이다. 하지만 자기 밑의 작업 인원들을 부릴 때는 씨팔 없이는 문장이 이뤄지질 않는다. 일을 할 때는 그리고 욕을 하면 대부분 일이 빨리 끝난다. 다른 반장들이 이반장한테 욕을 듣기 싫어서 빨리 끝나는 걸까, 아니면 욕을 듣고 힘이 마구 솟아서 빨리 끝나는 걸까? 욕먹고 힘나는 사람이 어딨겠냐마는 가끔씩 이반장이 기가 막힌 타이밍에 욕을 구수하게 뱉어주면 그것만큼 힘든 현장에 웃음을 주는 일도 없다.

 

 

 

이반장 휘하의 작업 인원들은 맨날 일해라 절해라 닦달해대는 이반장이 반가울 리 없지만 내가 한 발치 떨어져 지켜볼 땐 우리 인원들 케어랑 뒤치다꺼리는 이반장이 정말 잘한다. 사고라도 나면 결국 책임은 오롯이 작업반장인 이반장 몫이다. 그래서 가끔씩은 다른 사람들에게 신경질적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오야 마음은 오야가 되어야 알 수 있는 법이라고 생각한다.

 

오야 또는 오야지 : 작업반장을 뜻하는 은어. 직장의 책임자, 가게 주인 등을 친근하게 또는 얕보아 일컫는 일본어 親父[おやじ, 오야지]에서 유래했다.)

 

 

 

 

 

아래 반장이 사고 친 거 수습하는 이반장. 신속하고 원만하게 사고처리를 해냈다.

 

 

 

 

하루는 한 반장이 공장 내부로 지게차 유도를 잘못해 지게차가 공장 벽을 받아버린 때가 있었다. 벽이 푹 꺼지고 근처에 있던 자동문까지 다 부숴버려서 내가 봐도 한숨이 나오던 때, 이반장이 출동하더니 공장 직원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지게차 회사와 우리 업체 과실 등을 조정해서 사고 수습을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단순히 유도원만 질책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책임자로써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는 이반장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물론 씨팔씨팔 욕을 오지게 하긴 했다.

 

 

 

 

사실 오늘이 이반장과 룸메를 하는 마지막 날이다. 서포트 팀은 오늘부로 자기 팀에게 주어진 일을 모두 마무리했다. 이제 이반장은 고향인 시흥으로 돌아가고 오늘부터 나는 룸메 없이 혼자서 방을 쓰게 된다. 매일 아침과 일과 후 반복되던, 마치 성스러운 의식과도 같았던 그의 믹스커피 시음을 볼 수 없다는 게 정말 아쉽다. 샤워 후 커피를 마신 뒤에는 이부자리 위에 시체처럼 누워서 미동도 하지 않고, 드라마 세 개를 연거푸 내리보던 우리 이반장. 내가 너와 동갑인 딸이 있는데 이미 결혼도 해서 손주도 보니 참 행복하더라는, 그래서 너도 어서 결혼하여 부모님께 효도하라는 말만큼은 몇 번씩이나 반복해서 이야기하던 이반장. 가끔씩 그 모습들이 그리워질 것 같다. 반장님, 다음 현장에서 뵐 때까지 항상 건강하세요.

 

 

 

 

퇴근한 후 돌아온 숙소에서 이반장이 두고 간 과자선물을 발견했다.... 감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