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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가다 라이프

[토마의 노가다 라이프 #10] 믹스커피에 대한 단상

 

 

 

야구선수에게 껌이 있다면 우리들에게는 믹스커피가 있다

음식이 어떠한 특정 집단을 대표하는 경우가 있다. 불고기나 김치는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이고, 피자와 파스타는 이탈리아를 떠올리게 한다. 이렇게 음식은 특정 나라를 대표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특정한 직업을 떠올리기도 한다. 예를 들어 TV에서 야구 경기를 보다 보면 야구선수들이 껌을 씹으면서 경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할리우드 영화를 보다 보면 미국 경찰들은 야간 순찰 도중에 커피와 함께 꼭 도넛을 먹는다. 야구선수들에게 있어서 껌, 미국 경찰들에게 있어서 도넛. 그러면 노가다 일꾼들에게는 무엇이 있을까? 나는 단언컨대 그것은 믹스커피라고 말할 수 있다. 믹스커피는 노동자들의 지친 영혼을 달래주는 음식이다. 노가다 현장에서만큼은 믹스커피는 기호품이 아닌 생필품이다. 이것이 없는 현장은 그야말로 기본이 안 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앙꼬 없는 찐빵’이라는 표현을 이렇게 바꾸면 느낌이 어떨는지 모르겠다. ‘믹스커피 없는 현장’

 

 

 

류뚱도 껌을 씹으면서 공을 던진다.

 

 

 

 

 

야구선수는 왜 껌을 씹을까?

든 것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어쩌다가 투수들은 껌을 씹으면서 볼을 던지게 되었고, 미국 경찰들은 무심하게 도넛을 한 입 베어 물며 순찰차를 타고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느냔 말이다. 먼저 야구와 껌의 관계는 야구의 역사가 깊은 미국에서 찾을 수 있다. 초기 MLB에서는 야구 선수들이 긴 게임시간 동안 씹는 담배(Chewing tobacco)를 씹곤 했는데 나중에 이를 금지시키게 된다. 이때 선수들이 씹는 담배의 대용품을 찾게 되면서 껌을 씹게 된 것이다. 긴장감을 완화시켜주고, 입안에 마운드에서 피어오른 먼지를 없애주는 등 씹는 담배의 단점은 없고 장점만을 가진 껌은 많은 야구선수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고, 이는 여러 나라의 프로야구리그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 야구도 예외는 아니었다.

 

 

 

도넛 가게를 털려는 도둑들은 강심장이어야 할 것이다.  [ⓒAP Photo by Jeffrey Collins]

 

 

 

경찰과 도넛가게의 상생

그렇다면 경찰과 도넛은? 미국의 유명 도넛 매장인 던킨 도너츠는 24시간 운영되는데 도시의 불안한 치안 때문에 골치를 썩게 되었다. 이때 던킨도너츠의 초대 사장인 윌리엄 로젠버그는 기막힌 아이디어를 생각하게 된다. “낮 시간에 팔고 남는 커피와 도넛들을 심야시간대에 전부 경찰들에게 제공하면 어떨까?” 결과는 대성공. 언제 긴급출동이 떨어질지 모르는 경찰들에게 도넛은 들고 가기 쉬운 음식이었고 커피와 함께 무료로 제공되니 던킨 도너츠는 그들에게 좋은 휴식처가 되어 주었다. 또 도넛 가게는 경찰들이 자주 매장에 드나들게 되니 자연스럽게 그들의 안전을 보장받게 된 것이다. 그래서 경찰과 도넛이란 독특한 결합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거를 이름 그대로 부르는 반장은 아무도 없다. 맥심 노랑이 커피라고들 한다.

 

 

 

 

한국인의 발명품, 믹스커피

그렇다면 12g의 이 조그만 믹스커피가 어떻게 노가다판 한복판으로 들어오게 되었을까? 믹스커피는 1976년 한국의 동서식품이 봉지 하나에 1회 분량을 섞어 넣는 아이디어를 떠올려 1인분 포장 스타일의 커피믹스를 세계 최초로 개발한 것이 그 시작이다. 즉, 한국의 자랑스러운 발명품인 셈. 씁쓸한 커피에 적당히 달달하고 부드러운 맛이 기막히게 섞여 들어간 커피믹스는 분명 한국 노동자들에게 빠르게 전파되었다. 특히 철야근무가 많은 노가다판에는 더더욱. 노가다와 관련된 모든 장소에는 빠짐없이 이 커피믹스가 비치되어 있다. 인력소에도, 함바집에도, 현장사무실에도, 휴게실에도. 심지어 숙노 모텔에도 사서 비치하곤 한다.

 

 

내 룸메 이반장은 하루의 시작과 마무리를 커피믹스 타먹는 것으로 한다. 삶의 루틴이 되어버린 반장의 모습을 보면 ‘커피믹스 마시기’는 일종의 의식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새벽에 일어나 한 잔을 마시면서 오늘 어떻게 일꾼들을 놀게 하지 않고 일을 시켜 먹을지 고민해 보고, 일과를 마치고 샤워가 끝난 후 또 한 잔을 마시면서 오늘도 사고 없이 안전했던 하루를 감사해 하는 게 아닐까? 물론 물어보진 않았다.

 

 

 

커피믹스 봉지의 끄트머리를 떼어서 내용물을 종이컵에 넣는다. 컵에 뜨거운 물을 적정량 부은 뒤, 남은 플라스틱 봉지로 커피믹스가 잘 녹도록 휘휘 저어내면 커피 한 잔의 휴식이 완성된다. 오전과 오후에 한 번씩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휴식시간은 30분. 온전히 이 휴식시간을 즐길 수 있도록 제조 시간은 짧아야 쉽고 간단해야 했다. 그리고 설탕과 커피의 카페인. 설탕은 산업혁명기 때부터 칼로리 보충을 위한 값싸고 맛있는 원료였고, 카페인은 졸음을 완화시키거나 예방하고 피로를 잊게 하는 각성효과를 가지는 원료다. 이 두 원료의 적절한 배합과 제조의 편의성은 노가다꾼의 니즈에 완벽하게 맞아떨어졌고 그 결과 나는 오늘도 다른 반장들과 함께 쉬는 시간마다 믹스커피를 마시고 있는 것이다.

 

 

 

 

 

휴식의 순간마다 반장들의 손에는 커피믹스가 하나씩 들려있다.

 

 

 

 

 

“토마야! 커피 다 떨어졌다! 어서 가서 사 온나.”

 

 

성질 급한 정반장이 소리친다. 커피를 사 오는 건 순전히 막내인 내 몫이다. 소장한테 법인카드를 받고(“야! 사 올 때 많이 들은 걸로 사 와. 250개 있는 걸로. 알지?”) 현장을 나온다. 트럭에 시동을 걸고 가까운 하나로마트를 검색해서 네비를 찍고 달려간다. 마트에 들어가서 매대를 둘러본다. 내 차림새는 누가 봐도 노가다꾼이다. 왼쪽 팔에 두른 노란색 안전관리자 완장에 발목에 착용한 각반까지 틀림없는 노가다꾼 스타일. 게다가 머리를 길러서 단발에 가까운 내 모습은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사람들이 흘끗흘끗 쳐다보는 것만 같다. 마스크를 써서 다행이다. 커피믹스 코너에 가서 물건을 찾고 있자니 판매원 아주머니가 와서 홍보를 한다.

 

 

“손님, 지금 행사 중인 제품이 있는데 정말 싸게 드려요. 이거 보세요. 가격이 정말 저렴하죠? 이번에는 이 커피를 드셔보는 건 어떠세요?”

 

 

하지만 나는 이미 답을 알고 마트에 들어섰다. 반장들이 하루에 최소 두 번, 그렇게 수십 년 동안 마셔온 커피믹스. 오래된 세월이 축적한 입맛의 관성. 그 관성은 싼 가격이란 하찮은 가치 따위에 허물어지는 녀석이 아니다. 노가다 아재들에게 다른 선택지를 제시한다면 그들의 반발에 부딪칠 뿐이란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은 ‘이런 것이 요즘 새로 나왔어요’라는 말보다는 ‘항상 마시던 것이 최고지요’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사람들이라는 것도. 그래서 나는 커다란 노란색 맥심 커피 박스를 양손에 잡아들며, 아주머니에게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뇨. 반드시 이 녀석이어야 합니다. 여기 노가다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이 노란색 맥심 커피 아니면 절대 안 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