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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가다 라이프

[토마의 노가다 라이프 #9] 오래된 모텔은 우리들의 안락한 휴식처

 

 

 

가까운게 최고야

드디어 일과가 끝났다! 저녁을 먹고 나면 이제부터는 온전히 나만의 시간이다. 모텔에 가서 샤워하고 푹 쉬어야지.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진다. 모텔은 현장에서 5분~15분 내외의 거리에서 선정된다. 누가 뭐래도 가까운 곳이 최고다.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허물 벗어내듯 작업복을 훌훌 벗고 샤워를 샥샥 간단하게 한다. 샤워를 하면서 오늘 입었던 속옷과 양말을 빨랫비누로 살살 비비고 발로 꽉꽉 밟아서 빨래한다. 혹여 내 룸메가 먼저 샤워를 하는 날이면, 나는 룸메가 샤워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욕조에 따신물을 가득하니 받아놓고 전신욕을 즐긴다. 몸을 물에 푹 담그고 챙겨간 아이패드로 유튜브를 보거나 넷플릭스로 짧은 드라마를 보면 그날 피로가 다 풀리는 느낌이다. 아 참, 그런데 대체 숙노는 어떤 곳에서 자는 걸까?

 

 

 

내 첫 번째 숙소는 궁전모텔이었다. 잠자리는 전혀 궁전 같지 않았다.

 

 

 

 

차를 타고 시외 변두리 도로를 다니다 보면 보은장, 대호장 같은 옛날 분위기 풀풀 풍기는 이름을 내건 건물들이 있다. 여관이라고 해야 하나 모텔이라고 해야 하나 싶은 애매모호한 곳들. 옛날에는 대체 누가 이런 곳에 돈 내고 잠을 자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바로 그런 곳들이 우리 노가다꾼들의 둥지였다.

 

 

 

우리들은 신축 모텔을 거의 가지 않는다. 먼저 비용 문제도 있지만, 아마 그쪽도 좋아하지는 않을 거다. 왜냐하면 노가다 하는 사람들이 오면 방에서 담배를 피우는 경우도 있기... 아니 담배를 피우기 때문이다. 흡연자들끼리 묶인 방이면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노가다 하는 사람들은 방을 함부로 쓴다는 이미지가 있어서 그런지 어느 모텔은 현장 인원들이 쓴다고 하면 방을 내주지 않기도 한다. 그래서 모텔 중에 인기 없고 리모델링 되지 않은 곳을 찾다 보니 수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이름으로, 같은 모습으로 영업을 하는 보은장 또는 대호장에 가게 되는 것이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어두침침한 복도

 

 

 

 

방은 주로 온돌 방인 경우가 많다. 간혹 침대방인 경우도 있는데 누구는 침대서 자고 누구는 밑에서 자야 한다. 나는 침대서 자기는 했지만 기분이 편치는 않더라. 그리고 겨울에는 보일러를 빵빵하게 틀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퇴근하고 온돌방에 들어가면 공기가 훈훈해서 얼었던 몸이 사르르 녹는 느낌이 좋았다.

 

 

방은 2인 또는 3인 1실로 배정된다. 작업반장이 인원을 적절히 분류해서 방에 집어넣는데, 주로 담배 피우는 사람은 그 사람들끼리 묶어내고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분산시켜버린다. 또는 비슷한 나이대별 혹은 같은 지역별로 온 사람들을 묶어 주기도 한다. 나는 어쩌다 보니 총작업반장인 이반장과 같이 룸메가 되었다. 방은 두 명이 쓰기에 매우 크다. 전기장판도 큰 녀석이 있어서 그 위에 이부자리 만들어서 자면 된다.

 

* 이반장 : 총작업반장. 60대 중반. 소장 제외, 현장내 서열 1순위. 흡연자. 음주는 하지만 즐겨 하지 않고 과음하는 작업자를 혐오한다. 마르고 키가 크다.

 

 

 

 

오른쪽에 이불 잔뜩 깐 자리가 내가 자는 곳. 하나만 깔면 자기가 불편하더라.

 

 

 

노가다 아재들 중에는 "내가 살아보니 인생은 이렇더라 그러니까 너는 이렇게 저렇게 살아야 행복할 것이다. 암 그렇고말고!" 등 별로 듣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은데 내 인생에 훈수 두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이반장님은 그런 부류는 아니다. 내 프라이버시를 존중해 주고 내가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반드시 나이 먹었다고 꼰대가 되는 것은 아닌 거다.

 

 

 

다만 반장님이 상당한 드라마 애호가여서 매일 일일드라마를 시청해야 한다. 최근에 '찬란한 내 인생'이 끝나고 나니 지금은 '밥이 되어라'를 보고 있고 그게 끝나는 대로 막장드라마 '비밀의 남자'를 보고 있다. 아 참, 주말에는 '오 삼광빌라'까지. TV를 잘 안 보는 내가 드라마 이름까지 다 꿰차고 있다. 가끔씩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물어보면 반장님은 갑자기 눈이 초롱초롱해지시면서 드라마 줄거리를 설명해 주신다. 일 끝나고 유일한 낙이 드라마 보시는 분이니 드라마 이야기하면 그렇게 좋아하신다. 반장님 덕분에 나도 큰 방에서 생활하면서 큰 스트레스 없이 지내고 있으니 이반장님의 드라마 장광설만큼은 경청하곤 한다.

 

 

 

일을 마치고 깨끗이 씻고 난 뒤 이부자리에 누워있으면 세상 편하다.

 

 

 

 

오래된 모텔방은 그 예전 모습 그대로를 박제한 듯한 모습이다. 아마 그때 당시에는 유행이었을지도 모르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누렇게 뜬 벽지, 체리 색깔 몰딩, 나무 무늬 장판 그리고 이제는 유치해 보이는 조명과 세부 장식들. 과거를 기억하는 공간 안에 내 몸만 현재를 살아가는 것 같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대한민국이라고 하지만 예전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이 모텔처럼 아직 느리게 흘러가는 곳도 있다. 이런 곳을 내가 이 일이 아니었다면 올 수 있었을까? 마치 응답하라 1988 세트장에 놀러 온 듯한 느낌이다. 공짜 타임머신을 탄 듯한 경험을 즐겨본다.

 

 

 

다방이 아직도 이렇게나 많은지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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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문을 열고 용접사 박반장이 들어온다. 한 손에는 콜라와 후라이드 치킨 몇 조각을 든 채로.

 

"반장님, 저희 방에서 간단하게 치킨이랑 술을 먹는데 반장님은 술 안 드시니까 치킨 좀 챙겨 왔심니더"

"아 그래? 고맙다. 어이 토마야, 너는 같이 가서 한잔하고 오지?"

"넵 반장님, 그러면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 박반장을 쪼르르 따라간다.

 

 

"지금 사람들 608호에 다 모여있다, 토마도 술 좀 마시나?"

"네 그쵸, 이반장님 눈치 봐서 방에서는 못 마시죠 뭐."

"잘 됐네. 같이 한잔하자ㅋㅋ"

 

공짜술은 콜이지. 이때는 막내라서 좋다. 방에 들어가니 이미 아재들이 방안에 둥그렇게 둘러앉아 막 들어온 나를 반겨준다.

 

"안녕하세요 반장님, 치킨 냄새 맡고 왔슴다"

"토마 왔냐~ 오늘도 수고 많았다. 어서 와서 맥주 한잔 혀."

 

 

 

아재들의 치킨파티!

 

 

 

이야기 듣고 보니 용접사들끼리 치킨내기를 했다가 박반장이 져서 사는 거였다. 다들 많이 먹는 편은 아니라 치킨 두 마리 안주 삼아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술이 한두 잔 들어가니 현장소장이 화제에 오른다. 철골쟁이 정반장이 운을 뗀다.

 

 

“소장은 지금 우리들 서포트 작업하는 곳에 어떻게 코빼기도 안 보이냐? 맨날 컨테이너에 처박혀서 나오지를 않으니 말이야. 소장이란 직함을 단 사람이 그따위로 일하믄 안되는 거라”

 

“형님 말이 참 맞습니다. 아침 조회에도 맨날 한다는 말이 안전하게 일하라고만 하고, 그런 시답잖은 얘기는 나도 하겠소. 허 참.”

 

 

용접사 박반장이 맞장구를 치니, 곁에 다른 반장들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한다. 그리고 다들 쌓여있던 불만들을 한마디씩 거들며 술 한 모금씩 들이킨다. 나는 옆에 조용히 맥주를 마시면서 듣기만 한다. 불만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지라도, 다들 그 사람의 마음에 공감을 할 수는 있다. 나 같은 핫바지 노린이나 5060 아재들이나 가슴에 답답한 부분이 없을 수가 있겠나. 이렇게 다 같이 모인 데에서 이야기하며 속에 있는 화를 풀어낼 수밖에. 여기도 보통 사람들이 일하고 사는 곳이다. 사람으로 인해 상처받고, 사람을 통해 그 상처가 아물어간다. 오래된 모텔의 밤은 아재들의 이야기들과 함께 깊어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