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력소와 숙식노가다의 사람들
인력소는 인생의 끝바닥을 기어가며 오늘만 살아가는 사람들과 아무것도 모르는 싱그러운 노가다 새내기가 함께 어울려서 인력소장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기만을 기다리는 혼돈의 카오스와 같은 집합소라면, 숙식노가다는 인력소의 무디고 거친 인생들이 필터링 된 정제된 느낌의 노가다판이라고 될 수 있다.
일테면 조선소에서 또는 해외현장에서 돌고 돌다가 나이도 들어 원청 소속 기공으로는 은퇴한 아재 반장들이 집에 처박혀서 마누라 바가지나 긁히느니 밖에 나가서 그동안 배워먹은 기술로 용돈벌이나 하고 올까 하는 마음으로 오는 곳이랄까? 그래서 그런지 다들 나이가 많다. 50 후반된 아재가 여기서는 막내 취급받는 희한한 장소다. 적어도 지금 내가 소속되어 있는 업체는 분위기가 그렇다.
모두가 인맥으로 부르고 오는 집단들이라 하루 일과 마치고 저녁을 먹을 때마가 술이나 막걸리 한 잔씩 걸치고 들어간다. 얼큰하게 취해있는 아재 반장들을 트럭에 떠밀어 넣고 숙소로 데려가는 기사 임무는 주로 내가 맡는다. 여기서라도 그들의 환심을 사서 내가 캠핑을 하고 있을 때 그들에게 내 캠핑 사이트를 들켰을 때 씨익 웃고 넘어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캠핑은 뭐고 캠핑 사이트는 뭐냐고? 끝까지 읽어보면 안다. 나는 내가 이렇게 캠핑을 잘하는지 몰랐다.
다양한 개성을 지닌 노가다판 사람들
블로그를 시작한 나는 노가다판의 모든 부분을 날카롭게 또는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노가다 아재 반장들은 내 주요한 글감 소재가 된다. 인력소, 숙노판 할 것 없이 다양한 인간들이 한 데 모이면 집단 속에서도 자신의 자연스러운 본성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나는 약 2주간 그들의 생태를 빠짐없이 옆에서 지켜보고 자세하게 분석한 이후 그들을 일종의 기준에 따라 분류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하는 그간의 관찰을 토대로 작성한 노가다 아재별 캐릭터 속성 리스트이다. 코에이 삼국지에서 각 장수들의 스탯이 통솔, 지략, 무력 따위로 이루어진 것처럼 숙노판에서 도 다양한 속성들이 한 데 어우러져 하나의 독특한 개성을 가진 노가다 반장을 만들어낸다.
투머치토커
한마디를 물어보면 백 마디로 대답한다. 누군가에게 질문을 했는데 대답이 없어도 민망해하지 않고 스스로 답을 하며 말을 이어나가는 치열한 달변가. 나의 말을 들어달라고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려고 하거나 툭툭 건들면서 말을 한다. 이 속성의 캐릭터가 질문을 하면 단답형으로 대답해야 말이 더 나오는 것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다.
트래쉬토커
말끝마다 시8조8을 달고 산다. 일이 잘되면 잘 돼서 시8 일이 안 되면 왜 안되냐고 조8, 욕이 달리지 않으면 문장 구성이 힘들다. 욕을 잘못 붙여서 종종 뜬금없이 다른 반장들과 말싸움으로 번지기도 한다.
헤비워커
일을 하지 않으면 몸이 근질근질한 타입. 긴 휴식시간을 잘 견디지 못하는 듯하다. 작업 시작하고 일에 심취하면 혼자만 급발진해서 천천히 일하고 싶어 하는 다른 인원들까지 여럿 힘들게 하는 민폐 캐릭터. 스스로 일을 잘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낸대!
뭘 하든 기세가 등등함. 목이 빳빳하며 어깨 딱 펴고 위풍당당하게 걸어 다니는 편이고 다른 사람의 말에 반문을 잘하는 편. 목소리가 대부분 크고 사투리를 걸쭉하게 섞어 쓰는 경우가 많으며 종종 작업반장의 지시를 귓등으로 듣거나 반문하다가 다음날이면 현장에서 사라지는 타입.
프로게이머
휴식시간이나 점심시간에 핸드폰 게임 죽어라 하는 타입. 오랜 관찰결과 그들은 주로 포커나 맞고, 그리고 가챠 게임을 많이 한다. 게임에 현질하는 것이 그들이 돈을 버는 이유 중에 큰 부분을 차지한다. 내가 이 게임에다가 수 천을 부었다는 무용담은 이제 너무 뻔한 레퍼토리.
쌕쌕이할아범
아침부터 야동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는 혈기왕성 아재들. 카톡에 자신과 비슷한 속성의 아재들끼리 모여있는, 친목을 빙자한 쌕쌕이(야동) 공유방을 여러 개 가지고 있다. 스마트폰으로 야동을 무슨 신문 사설 읽는 것 마냥 세상 진지한 얼굴로 시청한다. 소리 끄는 걸 까먹고 야동을 켜서 컨테이너에 신음소리가 울려 퍼져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침착하게 음소거를 시키는, 호수와 같은 평정심을 지닌 쌕쌕이 애호가들.
캠퍼
출면일보에 항상 이름을 올리지만 대체 현장 어디에 있는지 잘 보이지 않다가도 작업반장이 오면 기가 막히게 현장에 돌아오는 캐릭터. 주로 공구컨테이너 구석이나 흡연장에 상주하며 작업반장이나 소장이 출몰하면 행동거지가 부산스러워진다. 일을 하나 시키면 함흥차사가 되어 이 녀석 대체 언제 오는 건지 슬슬 신경이 곤두설 무렵 귀신같이 돌아오는 얌체 캐릭터.
출면일보 : 오늘 일을 한 사람 목록을 적는 노가다판 출석표
닌자의 마음으로 캠핑하기
그리고 토마는 내추럴 본 캠퍼다. 항상 어디에 짱박혀 있을지 궁리를 하며 현장을 살펴본다. 공구 컨테이너는 이제 너무 뻔하다. 그러면 오늘은 어디로 가볼까. 안전교육장? 직원용 화장실? 새로운 곳을 찾아 오늘도 공장 구석구석을 누빈다. 일을 하면서 예비 캠핑 사이트를 눈여겨본 뒤, 실제로 거기서 수십 분간 캠핑을 하면서 효율성을 평가해 보기도 한다. 혹여나 다른 반장들한테 캠핑 현장이 발각되더라도 너무 걱정하진 말기를. 이미 그들의 대리기사 노릇을 하며 친분을 쌓아 놓지 않았던가.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처박혀 있으면 소상무나 다른 반장들에게 밉상이 될지 모르는 일. 항상 그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 하는 것이 포인트다. 그리고 소상무와 배관반장의 동선을 사전에 파악하여 그들의 시야 내에 적절한 빈도로 들어오는 것도 잊지 말자. 자 아무래도 현장에 너무 오래 있었다. 다시 꿀을 빨러 캠핑장으로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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