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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의 서재

[토마의 서재 #1] 제노사이드 (다카노 카즈아키 著)

 

 

 

 

쫓고 쫓기는 상황의 서스펜스

 

그 동안 심한 독서 편식에 빠져 있었다. 어쩌다보니 꽤 오랜 기간 하드보일드 소설을 섭렵해 왔고, 특히 <잭 리처 시리즈>에 재미를 들여 한동안 그것만 읽었던 것 같다. 해당 장르에 권태를 느끼던 중 「제노사이드」를 접하게 되었고 작품의 독특한 소재와 예측할 수 없는 이야기의 전개에 빠져들어 단숨에 완독하게 되었다.

 

 

아프리카 콩고의 깊은 밀림 속, 모종의 이유로 인류의 진화가 발생하였고 진화된 신인류는 유아 상태의 발육에서도 여러 개의 언어를 습득하고 초고난도의 수리 문제를 풀 수 있는 등 엄청나게 뛰어난 지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상황은 현생 인류에 대해 큰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싹을 자르기 위해 신인류를 제거하려는 프로젝트가 가동된다. 신인류에게 붙여진 코드명은 누스. 거대한 권력자에 의해 조직되고 실행되는 프로젝트를 통해 누스 제거 임무를 부여받은 4인의 PMC 용병들이 아프리카로 은밀히 투입된다. 숨통을 조여오는 위협을 감당하기에 아프리카의 신인류는 걷기조차 쉽지 않을 정도로 너무 어리지만 걱정마시라. 그를 성심성의껏 보살피는 보호자와 수수께끼의 조력자가 곁에 있고 거기다 그의 상식을 벗어난 지능이 더해져 코 앞에 닥친 위기를 교묘하게 피해낸다. 절체절명의 순간을 누스 일행은 어떻게 타개해 나갈 것인가? 쫓고 쫓기는 두 세력이 만들어 내는 서스펜스가 이 책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

 

먼저 책은 이해하기 쉽게 선악구도로 각 진영을 설정하고 있다. 신인류 누스를 지키려는 자와 제거하려는 자. 누스 제거를 하려는 쪽은 절대 악으로 몰고 가기 때문에 누스 입장에 감정이입을 하면서 읽게 되었다. 상당히 다양한 인간들의 시점을 통해 이야기는 전개되고 이를 통해 각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더 깊게 알 수 있었다.

 

 

특히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가 눈에 들어온다. 홀랜드는 폐포 상피 세포 경화증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는 아들을 둔 아버지이다. 아들 저스틴을 살리기 위한 일념으로 막대한 병원비를 충당하기 위해 군대를 때려치고 PMC에 들어가 각종 위험한 임무도 불사하고 뛰어든다. 의뭉스럽기 짝이 없는 네메시스 작전(누스 제거 작전명)에 투입을 결정한 것도 단지 용병비를 더 많이 주기 때문이었다. 힘든 훈련을 하면서도,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에도 오직 자식 생각뿐인 헌신적인 아버지이다. 또 작전의 핵심 제거 대상인 누스에 접근했을 때, 피어스가 아들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하자 바로 그들의 편으로 돌아섰다. 신인류의 위협이고 뭐고 그는 본인의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지키고 싶은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이게 아버지의 마음인가 싶었다.

 

 

반대로 이제는 아들의 이야기다. 대학원에서 제약 유기합성을 공부하는 겐토는 대학교수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이 믿겨지지 않는다. 적지 않은 부자관계가 그렇듯 이들도 대화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로부터 온 메시지를 단초로 그가 생전에 진행하던 폐포 상피 세포 경화증 치료제 만들기 프로젝트를 이어받게 된다. 그러면서 표면적으로만 보아왔던 아버지의 다른 모습을 알게 되고 조금씩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치료제 개발에 성공하면서 고가는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뜨겁게 외친다. 아버지 제가 해냈어요! 그리고 앞으로 지켜봐 달라고 기도한다.

 

아들을 반드시 지키고 싶어 했던 아버지 홀랜드, 그리고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인정받고 싶었던 아들 겐토는 둘 다 자신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일본에서 만나 뜨거운 포옹을 하게 된다. 이 두 캐릭터를 통해 아버지가 아들을 바라보는 마음, 아들이 아버지를 바라보는 마음이 전해졌다.

 

 

 

이 책은 신약 개발 메뉴얼입니까?

 

작가는 당 소설을 쓰기 위해 제약 과정에 대해 상당히 심도 있는 리서치를 한 듯 하다. 읽다보면 사실 이 책은 SF소설이란 탈을 쓴 신약 개발 프로세스 매뉴얼이 아닐까 생각 될 정도로 제약이 어떤 과학적 원리를 기반으로 하는지, 무슨 과정을 필요로 하는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주로 겐토와 그의 한국인 친구 이정훈과의 대화를 통해서 썰을 풀어낸다. 하지만 대화로도 이 복잡한 내용을 전부 설명할 수 없기에 작가가 전지적 시점을 빌어서 엄청 길게 설명한다. 읽다보면 저자가 주화입마에 빠진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자세하게 신약 개발의 과정을 설명하는데 이 때 잠시 독서를 쉬는 포인트로 삼기 좋았다.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시점이 홀랜드, 겐토, 루벤스 등등으로 이리저리 변경되면서 매우 흥미롭게 진행된다. 그리고 역사, 언어학, 약학, 정치학 등 다양한 분야에 있어 박학한 저자의 지식이 작품의 곳곳에 드러난다. 독서를 하면서 모르는 키워드는 검색하면서 공부도 하게 되고 덕분에 상식도 많이 늘게 되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사건의 진행에 있어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장면들이 적지 않게 있던 것이다. 일단 먼저 생각나는 것부터 적어본다.

 

신인류가 고심해서 선별한 4인의 PMC 중 한 명인 마이어스는 공군 항공구조대 출신이다. 그런데 극 중 진행을 따라가다 보면 마이어스를 뽑은 이유가 아프리카를 탈출하기 위해 필요한 비행기를 조종시키기 위함이라는데 그가 가지고 있는 비행기 면허라는게 세스나 면장...? 잠깐, 잠깐만... 아프리카 비행 탈출하는 파트에서는 항공업 현직자로서 더 집중해서(비판적으로) 읽게 되었다. 고작 단발 프롭 비행기인 세스나 면장 소유자가 제트엔진의 보잉을 조종한다? 이건 마치 보통 2종 운전면허를 가진 사람에게 매뉴얼 하나를 던져주고 포뮬러1 레이스 카를 조종하라고 하는 것과 똑같다. 아니면 모터보트 운전하는 친구한테 크루즈선을 운항하라고 한다던가. 오토파일럿 시스템을 이해해야 한다는 점에서 후자의 비유가 더 적절할 것 같다.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아마 시동 거는 것부터 큰 난관일 것이다.

 

좋다. 마이어스도 보통 실력자가 아니라 보잉 매뉴얼의 핵심만 독파하여 엔진 스타트, 택시, 이륙을 수행해서 어찌 저찌 오토파일럿 모드까지 변환시켰다고 하자. 그런데 기장석도 아니라 부기장 석에 앉아서(본인 입으로 기장석은 처음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세스나로 저고도 로컬 비행만 했을 사람이(세스나는 연료를 풀탱크를 채워도 길어야 4시간 비행이다) 수차례 관제권을 바꾸는 고고도 대륙간 비행을 14시간동안 이상 없이 수행 할 수 있을까? 리스크가 너무 크다. 하지만 이 모든 잠재적 위험을 일시에 날려버리는 간단한 해결책이 있다. 그냥 그 비행기를 몰고 온 기장이나 부기장 한 명을 매수하면 된다.

 

 

 

골드버그 장치를 설계하는 신인류

 

이 시점에서 누스 탈출계획의 빅픽쳐를 그린 설계자 에마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사카이 에마. 누스의 이복누나, 그리고 수수께끼의 조력자. 탈출계획의 중심에 있는 숨겨진 신인류 에마는 이야기의 후반부에 와서야 정체를 드러낸다. 사실 첫번째 신인류는 에마고, 두번째가 누스였지롱. 우리 에마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마치 루브 골드버그 장치를 운용하는 것 같다. 말하자면 단순하게 할 수 있을 만한 일을 굳이 ‘지나치게’ 복잡하게 해낸다. 위에 경비행기 몰던 마이어스에게 보잉제트기를 몰게 하는 이상한 계획 말고도 실행된 계획들 중 예시로 들만 한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먼저 에마는 PMC 중 리더 홀랜드라는 인물을 매수하면서 그 조건으로 아들의 병을 고쳐주는 치료제를 만들어 주기로 했다. 그리고 그 치료제를 만들기 위해 기프트라는 제약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개발한다. 근데 막상 프로그램의 운용은 자기보다 지능이 떨어지는 현인류에게 맡겨버리고 만다. 기프트라는 기적의 제약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혼자서 개발 할 정도로 똑똑하면 폐포 어쩌고 하는 병도 고치는 약도 직접 프로그래밍 하시지 왜 그거는 겐토 아빠한테 하청을 줬던 걸까? 그것도 제약 관련 전공도 아니라 바이러스 공학자인 분한테. 결국은 ‘우연히도’ 제약 유기합성을 전공하고 있는 아들 겐토가 하청을 떠맡으며 프로젝트는 제자리를 찾았지만 K-제약의 신성 갓정훈이 겐토 곁에 없었다면 제시간에 치료제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실 이것은 에마가 현생 인류의 가능성을 가늠해 보는 일종의 테스트라는 큰 그림이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마지막에 기프트를 줬다가 뺐는 모습을 보면 이 가설에 힘이 실린다. 근데 엄마를 시켜서 하청업자를 닦달하는 거는 조금 구차해보이긴 한다.

 

또 이야기 진행을 따라가다 보면 에마는 누스에게 가해지는 위협을 잠시 멈추기 위해 미국 부통령을(...) 암살한다. 하청을 좋아하는 에마는 이것도 하청을 주는데 그 방법 역시 여간 복잡한 게 아니다. 특정 타겟을 암살하기 위해 전세계 얼마 없을 진성 항덕후를 ―처음 조종하는 드론으로 미사일 조준 및 타격까지 완벽히 수행해내는 것을 보면 얘도 정상은 아니다― 찾아내서 그를 대상으로 한 시뮬레이션을 일부러 개발해서 조종을 시키는 것보다 그냥 공군 드론 파일럿 중에 홀랜드만큼 절박한 인간을(딸이 폐포 상피 세포 경화증을 앓고 있다던가. 그럼 일타 쌍피인데.) 매수하는 건 어땠을까? 그러면 이야기가 너무 단순해져서 재미없나?

 

그 다음은 물음표는 비행 탈출 시나리오다. 굳이 미국 연안까지 비행기를 몰고 와서 어그로를 잔뜩 끌어 전투기에 격추 당하는 위기를 겪느니 그냥 대서양 한가운데에서 HAHO 강하를 실시해서 밑에 돌아다니는 피어스 해운 소속의 여러 배 중 하나에 내리는 것은 어땠을까? 빈 제트기는 자동항법 시스템을 이용해 입력된 항로대로 비행하다가 전투기에 격추당하면 될 일이고. 모두에게 윈윈인 전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기 편대의 항로를 예측하고 해류도를 분석해가며 메탄하이드레이트 공격을 계획하고 성공시킨 에마의 기획력에 경의를. 그리고 묵묵히 명령을 수행하다가 영문도 모른 채 장렬히 전사한 4명의 F-22 파일럿들에게는 삼가 명복을.

 

사실 이 몇 가지 사례 뿐만 아니라 더 많은 부분들이 사건 진행에 있어 내게 물음표를 퍼부었지만 아무래도 분량이 너무 길어지니, 아니 이미 분량조절은 실패한 것 같지만 여기서 적당히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라고 썼지만 그래도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누스 일행이 닥친 위기를 어떻게든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해결해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사실 이미 계획된 거지롱 같은 전개를 보면서 약간의 분노와 함께 그래 어디까지 가나 보자하는 체념의 마음도 곁들여지니 독서를 끝까지 할 수 있게 만드는 재미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재미있게 읽었으면 됐지 왜 그렇게 진지충이 되었냐 물어보실 수 있습니다. 변명하자면 시국이 코시국인지라 마음도 갈수록 시니컬해진 것 같습니다. 예전 같으면 고개 한 번 기웃거리면서 그래 이 정도 설정은 그냥 그렇다 치자라고 넘어갈 수 있는 부분도 괜히 혼자 심각해져 ‘이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설정이군’이라고 되뇌며 반례만 찾아대는, 작가에게 기껍지 않은 독자가 된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게 다 코로나 때문입니다. 하지만 비록 마음이 배배 꼬인 꽈배기 독자의 심술 궂은 반론일지라도 이런 의견들이 결국 작가들이 글을 더 치밀하게 쓸 수 있도록 하는 자극제가 되진 않을까하는 이기적인 상상을 해 봅니다. 아마 다카노상은 제 글을 읽지 않겠지만 괜찮습니다. 나름대로 재미있는 책 한권을 읽었으니까요. 

 

 

재밌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추천은 하지 않을 것 같다. 마찬가지로 동작가의 타 저서를 읽을 마음은 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