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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울진비행교육원 훈련생의 수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졸린 눈을 비비며 무의식적으로 블라인드를 올려본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바다엔 수평선이 칼처럼 뚜렷해 마치 여기서부터 하늘이라고 알려주는 것 같다. 하늘도 깨끗하고 기숙사 앞산 나무들도 얌전한 것이 바람도 잠잠한 것 같다. 깔끔한 시정(視程), 낮지 않은 구름, 적절하게 부는 바람. 정말이지 비행하기에 딱 좋은 날씨군. 조종사가 되기로 마음먹고 울진비행교육훈련원에 온지도 벌써 반년이 지났다. 예전에 군출신이 아닌 사람들이 조종사가 되기 위해서는 비행교육을 받기 위해 반드시 해외에서 교육을 받아야 했는데, 이제 국내에서도 비행을 전문적으로 교육하는 훈련원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울진비행교육원도 그 중 하나이다.

식당에서 아침을 간단히 먹고 전날 배정받은 비행스케줄에서 비행기 콜사인, 이륙시간을 다시 한 번 확인한 후, 오늘 비행에 필요한 준비물들을 하나씩 체크해 본다. 헤드셋, 니보드와 체크리스트, 공항출입증, 로그북, 그리고 훈련매뉴얼. 모든 것들이 준비 된 후에 옷장을 열고 제복을 조심히 꺼낸다. 깔끔하게 다려 줄이 선 하얀 셔츠, 검은 바탕에 빛나는 노란 줄이 멋지게 수놓아진 견장. 셔츠의 왼쪽가슴엔 날개모양의 휘장이, 오른쪽 가슴엔 명찰이 붙어 있다. 보통 명찰은 왼쪽 가슴에 달지만 항공분야에서는 날개휘장을 왼쪽에 붙이는 것이 전통이다. 비행을 상징하는 날개를 심장에 더 가까운 왼쪽에 붙인다는 것이다. 참으로 낭만적인 의미라고 생각하며 옷을 갈아입는다.

제복은 마음을 차분히 만들어 준다. 제복을 입으며 나는 내가 조종훈련생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고 비행전의 긴장을 잠시 누그러뜨리곤 한다. 사실 내 인생은 제복과 인연이 깊은 것 같다. 대학에 갓 입학 했을 때 캠퍼스에서 제복을 입고 절도 있는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학군단 선배가 너무 멋있는 나머지 ROTC를 지원한 것을 보면, 난 제복을 좋아하는 것이 확실하다. 2년간의 후보생 생활을 보낸 후, 장교임관식에서 장교정복을 입으며 그 간의 혹독한 훈련을 이겨낸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했었지. 하지만 제복과 나의 인연은 더 많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어렸을 때 읽었던 그림책이었다. 세상의 여러 직업을 보여주는 그림책이었는데, 동물들이 각 직업을 나타내는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일테면 소방관복을 입은 하마가 불을 끄고 있거나, 경찰복을 입은 개가 나쁜 사람들을 잡는 그림들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내가 뚜렷하게 기억나는 것이 근사한 칵핏 안에서 씨익 웃으며 비행기를 조종하는 독수리 조종사였다. 후아. 나는 그냥 이 그림에 말 그대로 ‘홀려’버렸다. 단정한 제복을 입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칵핏에 앉아있는 독수리 조종사. 요 수많은 버튼들을 눌러가며 비행기를 조종해 하늘을 난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머릿속은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었지만 그래도 이 느낌 하나만은 분명했다. 정말 멋진걸! 아마 이때부터 조종사란 직업을 들을 때면 ‘멋있다’란 단어를 같이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비행준비를 마치고 공항으로 가기 위해 기숙사를 나선다. 기숙사 현관을 나서면 보이는 바다에 가슴이 트인다. 기숙사는 꽤 높은 언덕에 자리 잡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그 전망이 꽤나 일품이다. 덕분에 매일 아침 일찍 눈을 뜨면 수평선 위로 말갛게 떠오르는 태양의 장엄한 광경을 방에서 볼 수 있다. 기숙사 현관 앞에 모여 있는 훈련생 동기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려니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내 얼굴을 간질인다. 차분히 가라앉아 약간 서늘한 온도의 부드러운 바람. 가끔씩 눈을 감고 가만히 서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어디에서 불고 어느 정도로 부는지를 생각하곤 한다. 그러다가 살랑살랑 괜찮은 바람이라도 불면 기분이 좋아지곤 한다. 이 바람이라면 정말 멋진 이륙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아. 그렇게 바람은 내 마음에 들어오게 되었다. 바람도 구름도 들어오고 비도 들어왔다.

그 중에 소중한 것을 하나 꼽자면 별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울진에 와서 좋아하게 된 일 중 하나가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것이다. 기숙사가 위치한 기성면은 저녁이 되면 드문 인가나 도로변 가로등의 조그마한 불빛을 제외하면 칠흑 같은 어둠이 땅을 덮는다. 이 어둠을 밝혀주는 건 하늘에 무수히 수놓아진 별들과 달뿐. 나는 자연이 만들어낸 이 아름다운 걸작을 송구스럽게도 돈 한 푼 내지 않고 매 저녁마다 감탄을 자아내며 감상하곤 한다. 처음에는 북두칠성을 찾기만 해도 신기하게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별자리들을 꽤 여럿 구별할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별은 오리온자리의 허리 부분에 있는 삼총사 별들이다. 일직선으로 옹기종기모여 있어서 찾기도 쉽고 하나가 아닌 셋이기에 더욱 매력을 발산하는 녀석들이다. 종종 밤하늘의 이 별들이 더욱 선명하고 초롱초롱해 보이는 날이면 그 다음날 아침은 어김없이 깔끔하고 부드러운 모습의 하늘을 보여주었다.

이륙시간 1시간 전에 공항에 도착해서 비행계획을 제출하고, 교관과 함께 오늘 비행에서 배울 학습내용과 기상에 관련한 간단한 브리핑을 마치고 나면 공항 주기장에 들어가 탑승할 비행기를 사전점검을 실시하게 된다. 고장이 날 경우 도로변에 정차하면 되는 자동차와는 다르게 비행기는 공중에서 고장이 나면 목숨이 걸린 치명적인 사고로 직결될 수 있기 때문에 이 사전점검은 정말 중요하며 꼼꼼히 수행해야 한다. 점검사항들을 체크리스트에 따라 확인을 끝내고 나면 칵핏에 앉아 비행절차를 시작하게 된다. 활주로에 비행기를 정렬시키고 나니 관제사가 내 콜사인을 호출하며 이륙 허가를 내린다.

“UNI79, Wind calm, Cleared for take-off”

“Cleared for take-off, UNI79”
나는 바로 허가 교신을 복창하며 답신한다.

타워에서 이륙허가를 받고 서서히 스로틀을 최대출력으로 올린다. 점점 더 크게 진동하며 울어대는 엔진소리에 반응하듯 프로펠러가 맹렬하게 회전하며 비행기는 빠르게 질주한다. 비행기가 곧 이륙속도에 접근한 것을 확인하며 조종간을 당기면 바퀴는 지면에서 서서히 떨어진다. 내 몸이 붕 뜨는 것을 느끼는 동시에 칵핏의 전면은 곧 온통 구름과 하늘로 메워진다. 나는, 지금 날고 있다.

첫 비행에서는 내가 비행기를 조종한다는 생각에 무엇인가 하고 싶은 의지가 지나쳤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완전히 이 비행기를 통제하고 있다고 느끼고 싶어 조금은 과격한 조종을 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점점 비행이라는 것을 알아가면서 그러한 행동들이 얼마나 미숙했는지 반성하게 된다. 요즘에는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나는 비행기를 통제(Control)하는 것이 아니라 안내(Lead)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비행기는 가만히 놓아두어도 스스로 균형을 잡으려고 한다. 과격한 조종은 비행기를 더욱 피로하게 만들고 불안정하게 만들 뿐이다. 조종사는 그저 비행기에 앉아 하늘에서 바람과 구름을 읽어내고 비행기의 방향을 위로 아래로 약간씩 조정해주면 된다. 꼭 비행기를 이 길로 가라고 안내해 주는 것 같다. 하늘의 안내자라고나 할까. 조종사는 하늘과 친해져야 하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자연을 거스르고 이겨내는 게 아니라 그것들을 이해하면서 어우러져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하늘은 독특한 장소인 것 같다. 처음에 비행기 안에 있는 나의 존재에만 신경을 썼다면 이제는 하늘이란 공간 속에 점처럼 존재하는 내 존재를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치 끝이 없는 것 같은 이 거대한 공간의 미미한 내 모습을 인지하는 순간, 나는 겸허함을 느끼며 내가 지상에서 집착하던 수많은 욕망의 덩어리들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가지게 된다. 위에서 바라보면 모든 것들은 너무나도 작아 보인다. 마치 조그마한 레고 조각들로 만든 장난감 세상을 보는 듯한 기분이다. 사람들은 가끔씩 저 장난감 같은 세상에서 그보다 더 장난 같은 일들을 꼭 자신의 인생의 전부라도 되는 것으로 생각하며 시기하고 다투며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런 분들을 내 비행기 뒷좌석에 태우고 같이 하늘을 날아보고 싶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광경을 보여드리면 그 분들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비행을 마치고 공항을 나오는데 멀리서 조금은 낯선 엔진음이 들린다. 하늘을 지속적으로 울리는 소리가 잔잔하게 내 마음에 닿아온다. 손가리개를 하고 하늘을 바라보니 저 높은 곳에 조그마한 흰 새 모양의 항공기가 나아가고 있다. 그 흔적을 따라 비행기가 만들어내는 하얀 구름, 비행운(飛行雲)이 하늘이란 칠판에 그은 분필선 마냥 주욱 이어져 있다. 저 구름은 바로 내 아리아드네의 실. 놓치지 않고 따라가다 보면 나를 기다리고 있는 독수리 한 마리가 하늘을 날고 있을지 모른다.